고려청자는 한국 도자사에서 예술적 정점으로 평가받는 문화유산이다. 옥빛 비색의 유려한 곡선과 정교한 상감 기법은 고려인의 미적 감수성과 기술 수준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토록 귀중한 도자기들이 오늘날 수많은 해외 박물관과 개인 컬렉션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은, 문화재 반출의 역사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고려청자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국외로 반출되었는지, 그리고 그 배경에는 어떤 시대적·정치적 맥락이 작용했는지를 본 글에서는 살펴보고자 한다.
1. 최초의 반출 – 조공과 외교 사절을 통한 유출
고려 시대에도 청자는 국가적 위상을 대변하는 외교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와의 외교 과정에서 청자를 조공품으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청자가 중국 지역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청자의 초기 국외 유출은 이처럼 외교적 관계 속에서 제한적이고 공적인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는 곧 고려청자가 당대 동아시아에서 이미 고급 도자기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고려청자의 해외 반출은 특정 시점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외교·무역·침탈이라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시작점은 고려 시대의 공식 교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특히 고려와 송나라 간의 무역은 청자의 초기 유출 통로가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청자는 외교 사절이나 국왕의 하사품으로 외국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한 후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 제작된 정교한 청자를 보고 감탄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고려청자의 품질이 동시대 중국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았음을 보여주며, 이 시기에 일부 청자가 문물 교류의 일환으로 자연스럽게 외국에 전해졌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청자는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서 조공품으로 종종 선택되었다. 명나라 황실은 고려 도자기의 세련된 기형과 유약을 높이 평가하였고, 특히 상감기법이 적용된 청자병은 높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외교 활동은 청자의 해외 반출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킨 계기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명종실록에는 조선 초기까지도 고려식 청자를 예물로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조선 초기에 고려청자가 여전히 외교적 상징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일부 중국 궁정 수장고에는 현재까지도 고려 청자가 소장되어 있으며,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에는 고려청자 상감운학문매병이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외교의 일환으로 전해진 청자들은 이후 왕조의 궁중 기물이나 수장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약탈과 반출
본격적인 대량 반출은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전후하여 발생하였다. 이 시기 일본군은 조선 각지의 도자기 가마와 도공뿐만 아니라, 이미 소장되어 있던 고려청자도 약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본의 다이묘(大名)나 사찰, 왕실 소장품 목록에는 고려청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현재도 일본의 교토, 도쿄, 큐슈 지역 박물관에서 이러한 청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일부는 무기와 함께 전리품의 형태로 옮겨졌으며, 일부는 일본 상류층의 기호에 따라 수집된 것이다.
3. 개항기 이후의 시장 반출과 밀거래
19세기 말 조선의 개항 이후, 외국인 선교사, 상인, 외교관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고려청자의 유출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고종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수많은 외국인 수집가들이 한국에 들어와 고려청자를 수집하였고, 일부는 정식 구매 형식을 취했으나 다수는 불법적 밀거래를 통해 반출되었다. 특히 외국 고고학자들과 일본인 수장가들이 고려시대 무덤을 도굴하여 청자를 획득한 사례가 적지 않다. 이 시기 반출된 청자 중 다수는 현재 미국의 프리어 갤러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영국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4. 일제강점기 – 제도적 수탈의 시대
일제강점기에는 문화재 보호라는 명목으로 일본 정부가 주도하는 조직적인 반출이 이뤄졌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고미술품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일부는 공식적으로 일본으로 이송하였다. 이 과정에서 청자의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은 오히려 반출의 근거가 되었다. 일본 황실, 귀족 가문, 박물관에 반출된 고려청자는 지금도 ‘국보급’ 대우를 받으며 전시되고 있다. 더욱이 당시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문화재를 마음대로 보유할 수 없었던 반면, 일본인은 공식 절차를 통해 소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쏠림 현상이 극심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의 격동기에는 많은 문화재가 강제적으로 해외로 반출되었다.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그리고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이 무단으로 수탈당한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청자들은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 외규장각을 약탈하며 가져간 문화재 중 일부로 추정된다. 이들 청자에는 고려 후기의 대표적인 상감문양과 구형 병 형태가 남아 있으며, 도자기의 출토지나 소유 이력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도쿄국립박물관과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일부 고려청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가 조직적으로 수집한 문화재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5. 광복 이후부터 현대까지 – 경매와 기증을 통한 유출
해방 이후에도 고려청자의 국외 유출은 계속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국내외 경매시장을 통해 해외 컬렉터들이 적극적으로 고려청자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유럽이나 미국의 고미술 수장가들이 고가에 구입하였으며, 한국에서 밀반출된 청자가 해외 경매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와 반대로, 해외에 체류한 교포나 외국 연구자들이 한국 박물관에 고려청자를 기증한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프리어 갤러리에 소장된 다수의 고려청자는 20세기 초반 외국 수집가들이 가져간 이후 기증된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고려청자는 세계 미술 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국제 경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경로는 크리스티(Christie's)와 소더비(Sotheby's) 같은 세계적 경매회사를 통한 유통이다. 이들 경매에 출품된 청자들은 억대의 낙찰가를 기록하기도 하며, 고려 도자기의 예술성과 희소성이 글로벌 컬렉터 사이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로 작용한다.
실제로 2005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는 고려청자 상감국화문매병이 약 120만 달러(한화 약 13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당시 이 청자는 일본의 한 수집가로부터 출품되었고, 그 출처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에서 반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경매는 고려 도자기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문화재의 소유권과 정당한 반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6. 현재의 상황과 반환 노력
최근 들어 문화재 반환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려청자 역시 반환 운동의 주요 대상 중 하나가 되었다.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는 해외 소장품의 목록을 조사하고, 반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일부 박물관은 전시 협력, 디지털 아카이빙 등의 방식으로 협조하고 있으나, 실물 반환은 여전히 쉽지 않다. 특히 일본과는 문화재의 반환 문제를 둘러싼 외교적 마찰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청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보존 의지가 커지면서, 이들 유산을 다시 한국 땅에 되찾아오는 데 대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다행히 일부 고려청자는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2014년 미국 경매에 출품된 고려청자 참외형 주자 환수 건이다. 이 유물은 원래 서울 강남의 사찰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며, 경매 출품 사실이 알려지자 문화재청과 외교부, 그리고 민간 단체가 협력하여 해당 유물을 매입한 뒤 국내로 들여왔다.
또한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계 수집가가 사적으로 수십 점의 청자를 수집한 후, 이들 중 다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사례도 있다. 그중 일부는 고려 초기의 회청자 형태를 띠고 있으며, 도공의 장식 기법이나 태토 조성 등 학술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환수는 단순한 소장물의 회수가 아니라,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는 문화적 회복의 의미를 갖는다.
결론 – 청자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고려청자는 단순한 예술품이 아니라, 한민족의 정신과 기술이 응축된 역사적 기록물이다. 그러나 그 소중한 유산이 오랜 세월 외세의 침탈, 무분별한 거래, 그리고 제도적 수탈을 통해 국외로 흘러나간 현실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는 고려청자를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제자리를 찾아주는 문화적 책무를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고려청자의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그 끝은 곧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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