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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자사

일본 아리타 도자기와 조선 도공의 관계 – 숨겨진 역사, 전해진 기술

일본 도자기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 바로 규슈의 아리타이다. 오늘날 ‘아리타야키(有田焼)’로 알려진 이 도자기는 일본을 대표하는 자기(瓷器) 가운데 하나로, 일본 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이 아리타 도자기의 시작에는 조선의 도공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직 많은 사람에게 생소하다.

조선 도공들이 일본 도자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 흔적은 오늘날 어떻게 남아 있는지 살펴보자.

1. 임진왜란과 도공 납치 사건

16세기 말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임진왜란(1592~1598)은 단순한 전쟁 그 이상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문물과 인재, 특히 도공 기술을 탐내었으며, 전쟁 도중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이른바 '도공 납치'는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각 지역의 다이묘(大名)들은 조선 도공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움직였다.

이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의 수는 수백 명에 달하며, 그중 상당수가 규슈 지방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바로 이 지역, 아리타에서 조선 도공들이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이다.

2.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의 전설

아리타 도자기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바로 조선 도공 이삼평(李參平)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뒤,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 생산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전해진다.

이삼평은 일본에서 도자기 제작에 필수적인 백토(白土)를 발견하고, 그곳에 가마를 설치하여 자기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 일본에는 자기의 원료나 고온 소성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삼평의 기술은 획기적이었다. 그의 업적은 아리타 지역에서 대대로 전해졌으며, 후손들은 이삼평을 아리타 자기의 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3. 조선 도자 기술의 일본 내 전파

조선의 도자 기술은 이미 15세기까지도 동아시아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었다. 백자, 분청사기, 청자 등 다양한 기법과 양식을 바탕으로 조선 도자기는 기능성과 예술성을 모두 갖춘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기술력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본으로 전파되었으며, 조선 도공들은 일본 각지에서 기술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우선 고온에서 소성하는 기술을 일본에 전수하였다. 이는 섭씨 1300도 이상의 고온을 견디며 단단한 자기(瓷器)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아직 구현되지 못한 기술이었다. 또한 조선 도공들은 순백색 자기 제작에 필수적인 백토의 처리법과 가마 운영 기술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유약의 조성과 시유(施釉) 방식에 대한 지식도 일본 도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무엇보다 조형과 장식 기법에서도 조선 도공들의 미의식은 일본 장인들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 도공들은 단순한 기능 전수를 넘어 일본 도자기의 미적 기반까지 형성하는 데 깊숙이 관여하였다.

4. 아리타 도자기의 발전과 일본 도자 문화 형성

조선 도공의 기술로 시작된 아리타 도자기는 17세기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나베시마번(鍋島藩)의 후원을 받아 조직적이고 대규모 생산 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며, 유럽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리타 도자기는 일본 도자의 대표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17세기 후반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무늬를 가진 ‘이마리야키(伊万里焼)’ 역시 아리타 도자기의 변형 양식으로,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토대에는 조선 도공들이 남긴 기술적 유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의 기반을 닦은 장인이었다.

5. 남겨진 흔적과 오늘날의 재조명

오늘날 아리타 지역에는 조선 도공들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삼평을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있으며, 매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제사가 열린다. 또한 도자기 박물관이나 전시관에서도 조선 도공들이 전해준 기술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는 한·일 양국 간의 학술 교류를 통해 조선 도공의 영향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동안 일본 도자기의 역사에서 간과되었던 조선 도공의 존재가 점차 조명되면서, 문화사적 가치도 새롭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6. 조선 도공의 흔적이 남은 아리타 –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억

오늘날 아리타 지역에는 조선 도공들이 남긴 흔적이 여전히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이삼평을 기리는 ‘도창사(陶祖祠, 도조사)’는 아리타야키의 발상지를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하고 있다. 도조사는 1653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으로, 지금도 매년 5월이면 ‘도조제(陶祖祭)’라는 제사가 열려 이삼평의 정신과 기술을 기리고 있다. 아리타 지역 사람들은 이삼평을 단순한 외국 출신 장인이 아닌, 자신들의 기술적 뿌리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아리타 도자기 전통산업의 중심지에는 **규슈 도자문화관(Kyushu Ceramic Museum)**과 아리타 도자기 자료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도공들의 유입 이후 변화한 일본 도자 양식에 대한 전시와 연구 자료가 다양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통 가마인 **도키 가마(登窯)**와 초기 아리타 자기의 시제품들, 당시의 생활 도구로 쓰였던 도자기류 속에서도 조선식 백자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일부 고택과 도자기 공방에는 조선식 가마 구조를 본뜬 유구가 남아 있어, 전통 기술이 물리적 형태로도 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서 조선 도공의 아리타 정착과 활동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도조사 앞에 설치된 기념비에는 한국어로도 설명이 병기되어 있으며, 조선 도공들의 계보를 따라가는 답사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재조명은 단순한 과거 회고에 그치지 않고, 미래의 교류와 이해를 위한 중요한 토대가 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 도공들의 기술과 정신은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기술적 유산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아리타의 문화 정체성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7. 일본에서 보물로 지정된 조선 도자기 사례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일본은 조선의 도자기 기술과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여, 수많은 조선 도공들을 강제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이러한 도공들은 일본에서 도자기 제작에 참여하며 일본 도자기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조선 도자기 중 일부는 일본에서 '보물'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일본의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이도 다완(井戶茶碗)
    • 이도 다완은 조선 시대에 제작된 막사발 형태의 찻사발로, 일본 다도 문화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센노 리큐와 같은 다도 명인들이 애용하였으며, 일본에서는 '이도 다완'으로 불리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예를 들어, 네즈미술관 소장품 중 '시바타이도(柴田井戶)'는 오다 노부나가가 시바타 가츠이에에게 선물한 것으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일본 아리타 도자기와 조선 도공의 관계-이도다완
    이도다완
  2. 백자청화 매죽문 호(白磁靑花 梅竹文 壺)
    • 15세기 조선에서 제작된 이 백자 항아리는 매화와 대나무 문양이 청화로 그려져 있으며,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백자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
  3. 백자청화초화문각화(白磁靑花草花文刻花)
    • 일본민예관에 소장된 이 작품은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로, 일본 도자기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중요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선 도자기의 예술성과 기술력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도자기가 일본으로 반출된 경위는 대부분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 상황에서의 약탈이나 강제 이주에 의한 것으로, 문화재 반환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고 있다.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들은 이러한 문화재의 환수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와의 협상에서 법적 근거 부족 등의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약탈된 것으로 알려진 연지사 종(蓮沚寺鐘)의 경우, 국내 환수를 추진하고 있으나 10년 넘게 진전이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은 조선 도자기의 우수성이 일본에서도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역사적 아픔과 문화재 환수의 필요성을 상기시켜준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환수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